본문 바로가기

카테고리 없음

퇴사와 맥주 이야기

반응형

내게는 오랜 습관이 있었다.

주말 저녁마다 맥주를 마시는 일이다.

 

맥주는 아주 차가워야 한다. 

맥주캔을 젖은 티슈로 감아 20분 정도 냉동실에 넣어둔다. 

 

주중에는 제법 건강한 식단을 유지하지만

주말 저녁 메뉴로는 맥주와 잘 어울리는 치킨이나 피자를 좋아한다. 

한국식 치킨을 구하기 어려운 동네라

금요일 저녁마다 기름 냄새를 풍기며 직접 닭을 튀기던 시절도 있었다. 

 

벨지안 화이트나 hazy IPA, 과일맛을 첨가한 맥주를 즐겨마시는 편이다.

미국 살던 시절 가장 좋아했던 건 엘비스 주스라는 자몽맛이 나는 IPA.

 

출처: reddit.com

 

한 주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금요일 오후가 되면

느릿느릿 유독 시간이 더디게 가곤 했다. 

 

긴 기다림과 지루하거나 숨막히는 하루의 끝자락에서

차가운 맥주 한 모금을 들이키는 순간

롤러코스터에서 내려올 때처럼 짜릿함과 해방감을 느꼈다.

맥주 한 잔을 마시는 그 시간이 내게는 한 주 동안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 금요일과 토요일이었다.

가장 맥주를 마시고 싶은 날은 금요일이었다.

금요일 저녁이 되면 일주일 동안 회사일에서 받은 스트레스가 

온 몸에 가득 차서 풍선처럼 터질 것 같았다. 

고생한 나 자신에게 보상을 하지 않으면 못견딜 것 같았다. 

 

토요일은 주말이니까, 그리고 다음 날 출근 부담이 없는 날이니까. 

 

한 번에 기본 사이즈로 한 캔만 마시니까

일주일에 맥주 두 캔. 아주 많이 마시는 편은 아니지만

음주에 심리적으로 의존했다는 건 인정해야했다. 

 

가끔 술을 안마시려고 시도해 보았지만

직장 생활을 하며 십여 년 넘게 지속해온 리추얼이라

술을 끊는다는 일은 불가능하게 느껴졌다. 

'남들은 훨씬 더 많이 마시는데 뭐' 하고 자기합리화를 하게 되었다. 

 

내향적인 성격에 쉽게 긴장하는 편이다. 

맥주 마시는 시간은 회사 생활을 하며 받았던 스트레스를

잠시라도 잊을 수 있는 한 주의 유일한 낙이었기 때문에

어쩌면 나는 진심으로 술을 끊는 것을 원하지 않았던 것 같다. 

 

퇴사를 하면서 내심 좋았던 것 중 하나는

이제 출근할 걱정이 없으니 마음대로 술을 마셔도 된다는 것이었다.

앞으로는 내키면 낮술도 마시고 주중에도 마셔야지 했었다. 

 

 

그렇게 퇴사 후 몇 개월이 지났다. 

그런데 처음의 예상과는 달리 술을 덜 마시게 되었다. 

 

술을 완전히 끊은 건 아니지만 

일주일에 맥주 두 캔 마시던 게 한 캔으로 줄었고

그 한 캔에 대한 갈망도 예전보다 덜하다. 

 

회사 스트레스가 없어지다 보니

술을 통해 스트레스를 해소해야 겠다는 욕구 자체가 현저하게 줄어든 탓이 아닐까 한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퇴사에도 좋은 점과 나쁜 점이 있다. 

내게 가장 좋은 점은 내가 나 자신으로 살 수 있어서 느끼는 행복감이다. 

 

돌이켜보니 회사에 다니던 시절에는 행복하기 위해 인위적인 노력을 했던 것 같다. 

긍정이 긍정을 끌어당긴다는 사고에 심취하여

매 순간 '나는 행복해'라고 자기 암시를 하기도 했고

아무리 부정적인 생각이 드는 날에도 감사할 일 하나씩을 찾아 적어보기도 했다. 

동료들에게 내가 행복한 사람이라는 인상을 주기 위해 

억지로 미소를 띠고 자신감있고 긍정적인 말투를 사용했다. 

 

그렇게 행복하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데도 

늘 허물어져가는 언덕 위에 위태위태하게 서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데 요즘의 나는 참 행복하다. 

도파민이 넘치는 자극적인 행복이 아니라 봄볕처럼 잔잔한 행복이다. 

종종 '나 행복하구나'라고 생각하는 나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여행을 하며 힘들 때도 있고 나름의 고민과 불안이 없을 수는 없지만

내가 진정한 나로서 살아가는 느낌은 그 무엇과 바꿀 수 없다. 

 

가면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것, 

그리고 나 자신을 술로 달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은 참으로 자유로운 느낌이다. 

 

태국에서는 Leo 맥주를 마시고 있다. 

그리고 금요일 저녁 맥주 한 캔의 리추얼은 당분간은 계속될 것 같다. 

술을 아예 안마실 수도 있을까?

어쩌면 가능할 것도 같다는 생각이 태어나서 처음으로 든다. 

 

 

 

 

2024.10.29 - [여행자 일상] - 은퇴하고 여행하는 이유

 

은퇴하고 여행하는 이유

은퇴하면 여행을 하겠다고 다짐하는 사람들이 많다. 나 역시 그 중의 한 명이었다.  대학생 시절 오지로 훌쩍 떠났던 배낭여행을 통해 내가 여행을 사랑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곳에서 나는

fogo.tistory.com

 

2024.10.20 - [파이어하기] - 재테크 이야기: 나의 미국 주식 투자 방식, 그리고 두 번의 기회

 

재테크 이야기: 나의 미국 주식 투자 방식, 그리고 두 번의 기회

10년 동안 미국 주식에 투자한 경험을 적어볼게요.특정 종목이나 투자 방식에 대한 추천이 아님에 주의하세요.투자방식미국에서 직장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10년째 미국주식에 투자해오고 있다.

fogo.tistory.com

 

반응형